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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건으로 끝나 버린 오족(五族)의 공생
◆ 만주국
1932년, 만주 사변으로 점령한 토지에 일본이 세운 나라이다. 일본의 괴뢰 국가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괴뢰란 ‘조종하는 인형’이란 의미로, 그 인형으로 데려 온 인물이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의(溥儀)였다. 청은 만주족이 세운 왕조였기에, 그 지역 출신자를 원수를 삼으면 국제적인 비난은 피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관동군(만주의 일본군)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만주국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주국을 승인한 것은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의 세력 하에 들어간 타이, 버마 등, 약 20개국이었다.
총면적은 약 130만 평방킬로미터로, 현재 일본 면적의 3. 4배의 넓이에 해당한다. 현 중국의 동북삼성(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쟝(黒竜江))에 내몽고 자치구와 허베이(河北)성 일부를 포함한다.=지도 참조.
인구는 건국 당시 3,000만이었으나, 1940년에는 4,200만 명이었다. 중국인이 9할이고, 조선인, 몽고인 순이다. 일본인은 2% 정도였다. 일본 민간인은 건국 당시에는 23만 명이었으나 패전 시에는 155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패전 직전에 군에 동원된 개척단의 남자들을 포함하여 군인 60만 명 이상이 소련에 의해서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 사망자는 6만 명을 넘었다. |
마치 일본의 성을 이설한 것 같은 구 관동군 사령부. 지금도 그대로 공산당 지린(吉林)성 위원회로 사용되고 있다=중국•창춘(長春)에서 |
도쿄의 신오쿠보(新大久保)는 묘한 거리다.
한국, 중국, 몽골, 베트남, 타이, 말레이시아……. 여러 나라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고, 많은 외국어들이 난무한다.
옛 ‘만주국’이었던 중국 옌볜(延邊)의 조선족 자치주 사람이 낸 가게도 있다.
“제 고향 맛입니다”
라며,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연구하고 있는 히토쓰바시(一橋)대학 객원 연구원인 허수동(許壽童) 씨(43)가 나를 데려가 주었다.
허(許) 씨의 부친은1938년 8세 때, 가족과 함께 조선 남부로부터 당시 만주국이었던 옌볜으로 옮겨 갔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토지를 빼앗겨 먹고 살 수 없는 농민들도 많았다. 그러한 농촌 인구의 감소와, 만주로 일본의 세력을 늘리려는 이민 정책에, 밀려 나듯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
허(許) 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만주국과 그 당시까지 일본의 식민지와의 관계이다. 다른 하나는, 신오쿠보(新大久保)의 거리가 상징하는 일본의 지금과 만주국과의 관계다. 일본에서는 지금, 인구 감소와 출생률의 저하를 보충하기라도 하듯 외국인이 증가하여, 여러 민족과 공생하는 일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오족협화(五族協和) ’=키워드=에 실패한 만주국의 교훈에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을 떼자, 허(許)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족협화(五族協和)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이를 전제로 역사를 보아야 하겠지요”
만주국의 수도였던 창춘(長春)으로 갔다.
이곳 또한, 묘한 거리였다.
만주국 당시에는 ‘신쿄(新京)’라 불리던 곳이다. 장대한 도시 계획으로 만들어진 건물 군들이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대학이나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살아있는 역사의 테마파크라고나 할까.
예를 들면, 만주국 정부의 중추였던 국무원은 서양과 중국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구조로 일본의 국회 의사당과 같다.
왜 이런 곳에 일본의 성이 있는 것일까-- 라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거리의 중심에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 관동군 사령부의 건물이다. 만주국의 지배권을 누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일목요연하다. 지금은 공산당의 지린(吉林)성 위원회이다. 이 지역 최고의 권력자로, 권력의 바통 터치를 보는 듯 한 생각이 들었다.
침략자의 건물을 부수어 버리지 않고 계속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린(吉林)성의 공문서관에 해당하는 기관에서, 만주국 시대의 헌병대 문서 등을 정리하고 있는 장쭈치앙(張志强) 씨(55)에게 물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장(張) 씨는 말한다.
우선, 일본이 패전하여 만주국이 무너진 당시, 거의 몇년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설계는 일본인이 했어도, 지은 것은 중국인이다.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건물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것이 대세였다고 한다.
두 번째는, 청소년들의 ‘애국주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침략 당한 시대의 건물을 남겨두면 역사의 사실이 보일 테니까요.”
그렇다. 여기에 오면, 만주국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런데, 건물에는 ‘위만(偽滿)’ ‘위만주국(偽滿州國)’의 사적이라는 금속판이 붙어 있었다. 확실하게 눈앞에 존재하는데, 가짜라는 것은 어찌된 영문인지.
동북윤함(東北淪陷) 14년. 만주 사변으로부터 만주국의 멸망까지를 중국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동북(東北)지방이 점령되어 유린당한 굴욕적인 시대라는 의미이다. 20년 전부터 윤함사(淪陷史)를 만드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편집장을 맡은 지린(吉林)성 사회과학원의 쑨찌오우(孫繼武) 씨(81)를 방문했다.
“위만(偽滿)이라 하는 것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토지를 빼앗은 일본이 만든 나라니까요.”그 시대를 산 쑨(孫)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어를 배웠다. 담배(다바코)와 계란(다마고)의 일본어 발음을 구별하지 못해, 선생님에게 “바보”라 욕을 먹으며 매를 맞았다. 일본인 아이가 중국인을 때려도 선생님은 주의를 주지 않았다. 조례도 따로 따로 세웠다. “뭐가 오족협화(五族協和)란 말인가”. 일본에 대한 반감만 높아졌을 뿐이었다고 한다.
쑨(孫) 씨들은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말에 걸쳐서, ‘위만(偽滿)’시대에 일본의 개척민이 이주한 지역의 농민 100명가량을 인터뷰 조사했다. 드러난 것은 일본 군대에게 토지를 빼앗긴 농민의 모습이었다. 산과 들로 쫓겨나 황무지를 개간하든지, 토지를 손에 넣은 일본 개척민의 소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일본인의 대부분도 가난한 농민이었다.
“그들도 일본 침략의 희생자였습니다. 중국 농민과 우호적인 교제를 한 사람도 있었지요”. 이렇게 말한 후 쑨(孫) 씨는 곧 말을 이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인들은 몹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우등 민족이고 중국인은 열등 민족이라고 말입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쑨(孫) 씨가 학교에서 매일같이 강요당한 궁성요배(宮城遙拝)이다. 천황이 있는 도쿄를 향해 경배한 후 만주국 황제를 향해 경배하는 것이었다. 절 하는 순서만으로도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가라는 것을 아이들도 알 수 있었다.
◆ 외국인 208만 명
일본은 자녀수가 줄어드는 등 인구 감소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마치 이를 보충이라도 하듯 외국인이 증가하고 있다.
외국인 등록자 수는 2006년 말 현재 188개국의 208만 5천 명이다. 최근 10년 동안 67만 명이나 증가했다. 총 인구 중 차지하는 비율은 1. 6%이다. 국적 별로 보면, 1위가 한국•조선인 59만 8천 명이지만, 중국이 56만 명으로 급증하여 1위에 임박하고 있다. 그 외, 브라질, 필리핀 순으로 이어진다. 또한, 지금의 일본은 20쌍 중에 1쌍이 국제결혼을 한다. 남편이 일본인이고, 아내가 필리핀인이나 중국인인 경우가 많다. |
식민지 정책에 등 떠밀려 조선으로부터의 이민 급증
위에서 말한 허(許) 씨의 고향을 찾아가야 했다.
옌지(延吉) 공항에 내렸다. 차가운 냉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조선 남부에서 온 사람들에게도 이 추위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특히 만주국이 생긴 후로 조선인의 수는 급증하였다. 왜였을까.
옌지(延吉)에 있는 옌볜(延邊)대학 민족 연구원장인, 쑨춘리(孫春日) 씨(49)는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해 불만을 품고 도망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이 시작한 토지 조사에서 증명서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떠밀려 온 것이다.
조선인들의 이민은 17 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일본 통치 후 만주 사변에 이르기까지 100만 명을 넘어 만주국 당시에는 230만 명에 달했다고 지적을 하며, 쑨(孫)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만주국을 만든 후, 일본은 조선에서도 왕도낙토(王道楽土) 선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인의 반일 감정은 강했지만, 그 당시부터 일본에는 더 이상 이길 수 없다는 심리도 싹트기 시작해, 일본인 취급을 받아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 몫 챙겨보자고 만주로 건너오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1936년부터는 계획 이민 정책이 시작되었다. 20년 동안, 일본 농가 100 만 가구를 이주시켜 만주 인구의 1할을 차지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일본인만으로는 부족하여 조선인도 매년 1 만 가구를 이주시키려 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일본군은 조선인의 ‘반만(反滿) 항일운동’에도 애를 먹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농민들에게 ‘집단 부락’을 형성하게 하여 외부 항일 세력과의 분단을 도모했다.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를 차로 달리면, 여기저기서 ‘항일 전사’의 기념비와 만나게 된다. 그 많은 기념비의 숫자들이 일본의 가혹한 탄압과 수 많은 희생자들의 숫자를 말해 준다. “일본이 여기에 출장소를 낸 1907년부터 38년간의 항일 역사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안내를 해 준 옌볜(延邊)주 박물관 연구원 김철수(金哲洙) 씨(58)가 말했다.
대만에서도 관료•의사들이, 일본인과 같은 수준의 신분을 요구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만주(滿州)와도 연결되어 있던 대만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생겨났다.
타이베이(臺北)에 있는 중앙 연구원 대만사 연구소의 소장, 쉬쉬에치 (許雪姬) 씨(54)는, 만주(滿州)에 살았던 대만인에 대한 연구를 1990년대부터 계속하고 있다.
1947년 2월 28일에 국민당 정권이 주민을 학살한 ‘2•28 사건’과 그 후의 탄압을 조사하면서, 희생자들 중에 만주(滿州)에서 돌아온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 연구의 시작이었다.
“일본 통치 시대에 관한 연구는 그 당시 중국 남부의 충칭(重慶)에 가서 국민당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만 치우쳐 있었습니다. 만주(滿州)에 간 대만인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없었습니다”.
쉬(許) 씨는 우선, 만주 체험자 700명의 데이터를 모았다. 놀라운 사실은 의사가 많았다는 것이었다. 만주(滿州) 의대 졸업생만도 100명 남짓했다. 그 다음으로는 공무원이 많았다.
그 배경을 쉬(許) 씨는 이렇게 보았다.
“대만에는 고등교육 기관이 적은데다가, 취직도 쉽지 않고 일본인과는 급여 차별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인 대우로 활약할 수 있는 만주로 간 것이지요”.
또한, 대만 출신으로 만주국의 초대 외교부 장관을 지낸 씨에찌에(謝介石)를 동경해 만주로 건너간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쉬(許) 씨는 만주에서 돌아온 약 50명의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은 무거웠다. 씨에찌에(謝介石)가 전쟁 후에 ‘배신자(漢奸)(중국의 배반자)’가 된 것처럼 이들도 신변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38년에 개교한 만주국 최고 학부인 건국대(建國大)를 1 기생으로 졸업한 리쉐이칭(李水淸) 씨(89)를 만나게 되었다.
“입학했을 때는 오족협화(五族協和)에 대한 이상에 불타고 있었지요. 동창생은 지금도 형제와 같이 사이가 좋습니다”. 고운 일본어 말씨였다.
가난했던 리(李) 씨에게 학비와 의식주의 비용이 들지 않고, 용돈까지 나오는 건국대(建國大)는 멋진 곳이었다. 학생은 일본인, 중국인 외에, 조선인, 러시아인, 몽골인도 있어, 기숙사에서 6년간 생활을 함께 했다. 일본인은 쌀을 먹고, 중국인은 수수를 먹었다. 이러한 만주국의 차별에 분노하여, 여러나라 학생들은 쌀과 수수을 섞은 밥을 함께 먹었다.
하지만, 3 기생이 들어온 1940년 무렵부터는 동요기에 접어들어, 점차 붕괴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리(李) 씨의 견해다. 일본이 영미와 개전한 1941년 말에는 관동군에 의한 사상 탄압 사건이 일어나 옥사하는 건국대(建國大) 학생도 있었다.
전후에는 건국대(建國大) 후배가 2•28 사건으로 살해당했고, 리(李) 씨도 2년 반 동안 옥중 생활을 했다. 그런데도 리(李) 씨는 건국대(建國大)를 나와서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민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입장을 바꾸어 놓고 사물을 보는 자세를 배웠습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학 안에서의 이야기. 대학 밖의 만주국은 모순투성이었다. 행정의 톱에는 중국인을 앉혔지만, 그것은 이름만이고 실권은 그 아래 일본인이 잡고 있었다. 원래 만주국에는 국적법이 없었으므로 법적으로는 ‘만주 국민’은 한 명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일만(日滿)합병을 할 생각이었겠지요”. 리(李)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이렇게 만주국과 일본은 이미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이나 조선과 이어져 있다고 한들 아무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여기에 소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당시를 살아 온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쑨찌오우(孫繼武) 씨가 말한, 일본인의 ‘우월감’이다. 그런 감각으로는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것은 거짓말로 끝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외국인과 함께 사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어디선가 이민족, 이문화를 업신여기지는 않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구마모토 신이치 隈元信一)
◇ 만주국 건국으로부터 5년 후, 일본은 중국과 전면 전쟁을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 달의 특집에서.
◆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楽土)
건국이념으로서 만주국은 이 두 가지를 내외에 선전하여, 특히 일본인에게 꿈을 안겨 주었다. 오족(한족•만주족•몽고족•조선족•일본)이 사이좋게 지내자. 최초로 이를 제창한 사람들은 민간 재만 일본인이 만든 만주 청년 연맹의 사람들로서, 간부로는 지휘자로 유명한 오자와 세이치(小沢征爾) 씨의 아버지, 오자와 가이사쿠(小沢開作)도 있었다. 압도적으로 다수파였던 한민족의 배일 감정이 높아지는 가운데, 건국 당시 인구 1%에도 못 미치는 일본인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협화(協和)’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있었다.
한편 ‘왕도낙토(王道楽土)’는 무력으로 제패한 ‘패도(覇道)’에 대해서 덕으로 치정하는 ‘왕도’로써, 모두가 즐겁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이념이 일본의 무력으로 만들어진 만주국에서 주창된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
◆ 푸의(溥儀)
(1906~67) 청조 마지막 황제(선통제(宣統帝)). 성은 아이신자오뤄(愛新覺羅)이다. 2세에 즉위하여,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퇴위했다. 만주 사변이 한창일 때에 일본군에게 끌려가 1932년의 만주국 건국과 함께 집정하게 된다. 1934년에 황제(강덕제(康德帝)가 되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에는 소련에 억류되었다. 1950년 중국에서 전범이 되었지만, 59년에 특사를 받아 일반 시민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자서전에는 “관동군은 고압 전원이었고, 나는 정확하고 민첩한 모터와 같은 존재”였다고 쓰여 있다.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자각하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
http://blog.daum.net/jjkkss6944/869?t__nil_feedback=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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