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대전 연구실에서 만난 한순규 한국과학기술원( KAIST) 화학과 교수는 “마약 중독은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라고 말했다. 마약 중독을 범죄 행위로만 보지만, 사실 치료가 가능한 질병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매년 수십 종의 신종 마약이 등장하지만, 마약 중독을 치료할 치료제는 제대로 개발된 적이 없다. 망가진 뇌를 되살리는 것 자체가 워낙 어려운 데다, 임상시험이 어려워 글로벌 제약사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기존 치료제가 증상을 낮추는 정도에 그친다고 보고, 그와 다른 근본적 치료제에 도전했다.
지금도 마약중독 치료제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약은 있다. 한 교수는 엄밀히 말해서 치료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날록손( naloxone) 같은 오피오이드( opioid) 성분을 함유한 치료제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농도를 마약 복용보다는 낮고 금단 현상을 유발하는 것보다는 높은 정도로 유지한다” “증상 완화에 초점을 맞출 뿐 근본적으로 망가진 뇌 회로를 회복하지는 못 한다”고 말했다.
오피오이드는 아편과 유사한 합성 마약성 진통제이다. 보통 통증을 줄이는 용도로 쓰지만 과도하면 마약이 된다. 오피오이드를 많이 복용하면 신경세포에서 도파민 농도가 높아져 극도의 쾌감을 느낀다. 도파민은 뇌의 보상체계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로 기쁨과 쾌감을 느끼게 한다.
뇌는 도파민 수용체의 발현을 줄이는 식으로 오피오이드에 대응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내성이 생기고, 전과 같은 쾌감을 느끼기 위해 마약 복용량을 늘리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마약 복용을 중단하면 생기는 불안 증세나 우울증 같은 금단 현상은 뇌의 기능 저하로 정상적인 도파민 전달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발생한다. 미국에서 2022년 한 해 동안 약물 오남용으로 인한 사망자가 10만7941명 나왔는데, 이 중 오피오이드 오남용으로 인한 사망자가 8만1806명이었다.
미 식품의약국( FDA) 허가를 받은 마약 중독 치료제는 오피오이드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메타돈( methadone), 부프레노르핀( buprenorphine), 날트렉손( naltrexone), 날록손이 다 그렇다. 불법 마약을 복용할 때보다 완곡한 보상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마약 복용을 중단할 때 생기는 부작용을 줄여준다. 중독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만, 오피오이드를 함유하고 있고 중독성도 있다. 치료제 복용을 중단하면 6개월 안에 다시 불법 마약을 복용할 확률이 50%나 된다.
그나마 오피오이드 계열 마약류는 임시 방편이라도 있지만, 국내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필로폰(메스암페타민)이나 코카인은 이런 치료제조차 없다. 한 교수는 “필로폰이나 코카인은 오피오이드 계열의 마약류와 작용하는 원리가 다른데, 여기에 맞는 치료제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자연에 있는 천연물에서 고부가가치 화합물을 찾는 과학자다. 현대판 연금술이라고도 불리는 화합물 합성이 한 교수의 주 특기다. 국내에 자생하는 약용식물인 광대싸리에서 나오는 천연물과 똑같은 물질을 합성해 난치성 신경질환 치료제로 쓸 수 있는 물질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천연물에 기반한 화합물이 마약 중독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 수 있다고 본다. 현재 사용되는 치료제처럼 임시방편으로 부작용을 줄이는 게 아니라, 마약중독으로 망가진 뇌의 신경회로 자체를 복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뇌는 성장과 재조직을 통해 스스로 신경회로를 바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신경가소성( neuroplasticity)’이라고 한다”며 “마약으로 손상된 뇌의 구조와 기능을 복구하도록 유도하는 물질을 찾으면 마약중독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는 이미 임상시험에 착수한 연구진도 있다.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화학과의 데이비드 올슨 교수는 델릭스 테라퓨틱스( Delix Therapeutics)라는 회사를 차리고 마약 중독과 불안, 정신분열증 같은 신경질환을 신경가소성 유도제로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임상 1상 시험이 진행 중이고, 내년에 2상에 착수할 계획이다.
올슨 교수가 찾아낸 물질은 아프리카에 자생하는 나무인 ‘이보가’의 뿌리에 존재하는 물질인 이보가인이다. 이보가인은 과거부터 중독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는데, 심장발작 같은 부작용도 컸다. 올슨 교수는 이보가인에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분자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올슨 교수가 이보가인을 기반으로 만든 타버난타로그( Tabernanthalog)는 생쥐 실험에서 탁월한 효과를 보였기 때문에, 임상시험 결과에도 과학계의 관심이 크다.
한 교수도 올슨 교수처럼 마약 중독으로 망가진 뇌의 신경회로를 복구해주는 신경가소성 유도제를 만들고 있다. 한 교수는 “이보가인은 우리도 눈 여겨 봤던 화합물이었다”며 “이보가인 외에도 신경가소성을 유도할 수 있는 여러 물질을 천연물을 통해 찾은 상태”라고 말했다. 남은 과정은 어떤 물질이 뇌의 망가진 신경회로를 복구할 수 있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실제 실험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 교수는 말했다.
한 교수는 마약 중독 치료제 개발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다만 개발 과정의 어려움과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이 어렵다는 점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더디게 진척할 뿐이라고 했다.
마약 중독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마약 중독을 범죄행위로만 보고, 중독자에 대한 치료제를 만드는 데 정부 예산을 쓸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교수는 마약 문제가 10대 청소년까지 파고들 정도로 사회 전반에 확산된 만큼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약 문제를 근절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수요를 없애는 것”이라며 “마약 중독 치료제를 개발해서 중독자들이 금단 현상 때문에 마약을 찾지 않도록 하면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약 중독 치료제는 우울증이나 알코올 중독 같은 다른 뇌 질환 치료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한 교수는 “신경가소성 유도를 통한 뇌 구조와 기능의 정상화는 아직까지 성공한 적이 없는 마약 중독 치료법”이라며 “연구가 결실을 맺으면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큰 마약 중독을 해결하고, 노벨상까지도 가능한 연구 성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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