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항암 치료를 조금만 쉬면 안 되겠습니까?”
“어떤 일로 그러시지요?”
“제가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 중요한 일이 어떤 일인가요?”

그는 기대 여명이 길지 않은 72세 폐암 환자였다. 폐암 중에서도 독한 유형이었다. 지금은 항암 치료로 근근이 유지하고 있었지만 언제 내성이 생겨 암이 나빠질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치료를 받아왔다.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별로 안 했고, 가족들 역시 아버지를 열심히 간병했다. 그런 그가 항암 치료를 쉬고 싶다고 하기에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 중요한 일이 어떤 일인가요?”
“제가 사업하던 것이 있는데, 사업을 이제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이제 슬슬 사업을 정리하는 것이 맞겠지요?”

그는 내 물음에 답하며 본인에게 이제 남은 시간이 정말 얼마 없지 않으냐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도 이제 3~4개월을 더 넘기기 쉽지 않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암 환자분들 중 사업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업을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한 사람이 평생 일구어 온 일이라면 그 일은 몇 개월 내에 정리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 와중에 독한 세포 독성 항암 치료를 하면서 몸 상태가 안 좋다면 단기간에 사업을 정리하는 건 더욱 힘들 터였다. 어쨌든 환자가 현재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 그것이 의사인 내가 환자에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예우였다.

이분의 경우는 명확했다. 평생 일궈 온 사업을 자녀에게 잘 물려주는 것. 환자 본인 없이도 사업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자녀들이 잘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환자가 평생 만들어온 그의 세계가 그 없이도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우리는 미련 없이 항암 치료를 중단하기로 했다. 그 대신 나는 환자가 최대한 안 아프게 지낼 수 있도록 진통제를 늘렸다. 어느덧 외래에서는 의학적 이야기보다 사업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됐다.

사진 게티이미지

“사업 정리는 잘 돼가고 있으신가요?”
“아이고야… 그게 참… 뜻대로 안 되네요. 맨날 애들하고 싸웁니다.”

자녀들이 간단한 일조차 잘하지 못해 자꾸 잔소리하고 화내게 된다고 한다. 나는 말했다. 본인은 30년 해오던 일인데 고작 몇 개월 만에 자녀들이 당신만큼 해내겠느냐. 어떻게 자녀들이 당신 마음에 쏙 들게 잘해낼 수 있겠느냐. 다 욕심이다. 그마저도 내려 놓으시라. 그래야 가족이 평온할 것이다.

“그건 나도 알아요. 그런데 잘 안 되네요. 자꾸 일이 펑크가 나요.”
평생을 일구어 온 사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컸으나 자녀들이 숙련된 경지에 이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아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잘 되었네요. 자제분들이 실수하더라도 환자분이 살아 계실 때 해야 어떻게 만회하는지 알려주죠. 환자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자제분들이 실수하면 당황스럽고 아버지 생각이 더 날 거예요. 사업하다가 잘 안 될 때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면서요. 잘됐어요. 자녀들이 마음껏 실수하도록 한번 내버려 둬보세요.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잖아요.”

윤영호 교수의 책 『나는 품위 있게 죽고 싶다』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삶은 이어달리기와 같다. 우리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떠나야 하는 때가 오면 기꺼이 바통을 넘겨주어야 한다. 미련 없이, 후회 없이 넘길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렇다. 바통은 누군가에 넘겨주어야 한다. 그리고 떠날 때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바통을 이어받는 사람들이 내 몫까지 잘 해내리라 믿고 떠나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언젠가는 잘 해내리라 믿으셔야 해요. 전적으로 믿으세요. 설령 환자분 마음에 들게 못 해내더라도, 설령 실패하더라도 분명 그 속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배울 겁니다.”

사실 바통을 꽉 움켜쥐고 열심히 달리다 넘겨야 할 때가 왔는데도 쥐고 있던 바통이 아까워 넘기지 못하고 혼자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바통을 넘기려고 보니 넘겨줄 바통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는 사람도 있다. 혹은 넘길 준비를 다 했는데 주변에 넘겨받을 사람이 없는 일도 있다. 또 혹은 평생 달린다고 달렸는데 나중에 보니 제자리걸음이었고 바통을 넘겨받을 사람은 저 멀리 있는 때도 있다. 그러니 쥐고 달릴 바통이 있고 넘겨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이다.

 우리가 쥐고 있는 바통이 무엇이건, 그것이 스스로 만든 것이건, 누군가에게서 넘겨받은 것이건 영원히 당신만의 것일 수 없고, 당신 또한 무한히 달릴 수도 없다. 우리는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고, 불가피한 죽음을 통해 삶을 완성해 나갈 뿐이다. 의미 있게 살다가 삶을 마무리할 때가 되면 넘겨야 하는 것들을 다음 사람에게 잘 넘기는 것까지가 인생의 완성이다.

혹 지금 당신도 잘 달려왔고 이미 바통을 넘겼다면, 이제는 한발 뒤로 물러나 관람석에서 편안히 경기를 지켜보며 달려나가는 선수들을 응원하기를 바란다. 삶이라는 아름다운 이어달리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