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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는 가장 가혹한 경제 수난 시절 도약의 발판이었다. 6.25전쟁을 겪고 나서 인구는 팽창하고 식량은 부족했다. 충주 비료공장 하나로서는 수입 비료에 의존할 수밖에 도리 없는 일이었다. 값비싼 비료를 사용하게 되니 비료의 절대 부족을 느꼈다. 식량 생산의 절박함에도 비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울산 비료공장과 남해화학이 가동할 때까지 빈곤에서 헤어나려 허우적대던 시절이다. 거기에다 가뭄을 해마다 자주 겪어서 설상가상의 허기를 면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쌀밥이 얼마나 귀한 보배라는 것은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은 뼈에 사무치도록 느낀 일이다.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두 해 연속 가뭄이 극심하여 심각한 사태를 겪었다. 심지어 도지사의 이름 글자에 불화 변이 들어서 가뭄이 왔다는 유언비어에 곤욕도 치렀다. 당시는 수리시설이 열악하여 물 부족이 극심했다. 모를 심은 들판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서 민심조차 흉흉하기도 했다. 정부는 중농정책을 발표하고 모든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식량 생산에 심혈을 기울였다. 식량 증산 총력전으로 전시처럼 비상체제로 용어조차 군사용어인 작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쌀이 부족하면 정부를 비난하고 정부전복을 꾀할 수 있는 슬로건이지만, 절대다수 국민은 정부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필자가 공무원 첫 발령지가 면사무소여서 정부의 식량 증산 대비에 대한 방안이 심각함을 직접 보고 느꼈다. 군수나 도지사가 떴다 하면 면장은 양수기 보관시설에 비상이 걸린다. 만약에 고장이 난 양수기 한 대라도 발견되면 면장이나 군수의 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이다. 임의로 양수기 한 대를 지적하면 면장은 즉석에서 직원을 시켜 시동을 걸어본다. 양수기 시동 장면은 전투 현장처럼 긴장감이 고조를 이룬다. 지켜보는 면장이나 군수는 조바심으로 어찌할 바를 모를 긴박상태다. 도지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기계의 시동을 바라보는 군수나 면장은 간이 콩알 팥알 같은 심정이다. 라디오로 나오는 뉴스는 연일 어느 지역 공무원 직위해제가 이어졌다. 공무원 자리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양수기는 매일 담당 직원이 닦아서 반들반들하다. 양수기에 빨간 글이 쓰여 있어서 자세히 보니 "피의 대가 아껴 쓰자!"로 쓰여 있다.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구입되었다는 뜻이다. 이 양수기가 우리 식량 생산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가뭄이 길어지면 들판마다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가 겨레의 기적처럼 울렸다. 밤낮없이 퍼 올리는 지하수에 벼가 먹고 남는 물은 그대로 땅속으로 스며들어 다시 퍼 올리게 된다는 일이다. 우리나라 논의 대부분이 심도가 깊은 흙이라 지하수가 땅속의 토양에 무진장 매장된 느낌이다. 이런 지하수 이용을 생각해낸 대통령 이하 각료들이 선견지명을 만들었다. 당시 지하수로 만들어지는 쌀을 창고마다 쌓이게 하는 행운이었다.
당시 중농정책은 시기에 맞게 매우 적절한 조치였다. 식량이 무기화되고 있던 시절이다. 미국이 베트남의 하노이 북폭을 감행해도 소련은 헛구호만 날릴 뿐이었다. 말로만 목소리를 높였지 실질적인 전쟁수단은 쓰지 못했다. 미국의 밀가루를 구입해오지 않으면 당장 내란이라도 일어날 수 있기에 말이다. 당시 소련 땅에는 이상저온으로 밀 수확이 큰 피해를 당해 곤경에 처한 형편이었다. 국제적으로 식량이 무기 역할이 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시장, 군수가 논두렁을 운동화 신고 뛰어다니도록 한 정부가 국민의 굶고 헐벗음을 구한 일이다.
식량 생산의 적은 바로 가뭄과 비료 부족이었다. 대대적인 풀베기 운동으로 퇴비생산에 집중하고 가뭄 대비에는 지하수 이용을 최대한 늘렸다. 우리나라 풍부한 지하수가 한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비료공장 증축과 지하수 활용 극대화는 우리 경제의 발판을 만들었다. 통일벼 재배 성공으로 실량 걱정을 덜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논에 통일벼 재배해서 알게 된 일인데 일반벼보다 3배가 더 수확되는 기록을 세운 일이다. 그렇게도 귀해서 실컷 먹어보지 못한 쌀밥을 국민들이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것도 통일벼 덕택이다. 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새로운 역사를 바꾸게 된 일이다. 오늘날 기상천외하게도 쌀 천대의 기회를 만든 일이기도 하다.
중농정책이 성공을 거두자 이제 중농정책에서 중공업 정책으로 바뀌었다. 식량 확보로 배고픈 일을 면하자 수출정책을 쓴 일이다. 부존자원이 형편없는 나라에 수출이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초기는 할머니들 얼레빗에 묻어나는 머리칼이 엿장수를 거쳐서 수출품이 되었다. 가발이 한때의 인기품목이기도 했다. 석유화학공업이 모든 산업의 원료생산 몫으로 컸다. 대단위 정유시설이 우리 공업의 앞날을 밝게 한 일이다. 포항종합제철이 철의 생산으로 성공을 거두자 조선산업이 점화되었던 획기적인 행운을 가져왔다. 조선산업은 지금도 세계 1위를 자랑한다. 정유산업에서 나온 부산물로 고속도로를 만들어 경제 동맥을 활력화 시켰다. 이것도 모르고 경부고속도로 설치를 반대한 사람들은 역사에 안 좋은 족척을 남겼다.
중화학공업에서 성공한 일은 경제축적 영향에 정밀과학으로 발전했다. 컴퓨터 산업과 스마트폰 사업의 성공은 반도체 생산의 성공을 이룬 성과다. 반도체 수출 세계 1위가 한국이다. 스마트폰 판매 세계1위가 한국의 삼성이다. 삼성이 이야기하는 "초격차 반도체"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하게 한다. "초격차 반도체"는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도록 삼성이 주도한다는 계산이다. 북한처럼 국민이 배가 고픈 환경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성과다. 모든 경제발전의 발판은 배고픈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낸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배고픈 환경에서 벗어나자 제일 먼저 나타난 국민들의 교육열이다. 대학교 졸업자가 넘쳐나는 사회로 발전하니 고급인력이 외화획득에 전진기지로 작용했다. 기초과학에 기울이는 경향으로 갔다면 오늘의 영광보다 더 큰 발전도 가능했을 일이다. 기술로 가야 할 인재가 법대 쪽으로 몰린 일이 아쉬운 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 글 : 박용 제6에세이집 2019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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