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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협상을 목전에 둔 지금, 주요 농민단체들이 농업보호의 근거로 내세우는 '식량무기화론'을 비판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식량무기화론을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과연 식량무기화론은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이론인가? 식량무기화론이 제기하는 주요한 세 가지 측면을 검토해보면 유감스럽게도 답은 '아니오'다.
첫 번째로, '종속'의 측면을 살펴보자. 식량무기화론자들은 미국계 곡물메이저의 담합 혹은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식량 특히 주식인 쌀의 공급이 좌지우지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 사실 세계 쌀 시장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현재 세계 쌀 수출 1위에서 5위까지의 국가는 순서대로 타이, 베트남, 중국, 인도, 파키스탄이다. 더욱이 우리가 주식으로 하는 '자포니카' 종은 중국, 이집트, 이탈리아, 일본, 호주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또 생산이 가능하다. 미국이 우리의 식량줄을 틀어쥐고 마음대로 내정간섭을 한다는 상상은 정말로 '상상'일 뿐이다.
두 번째로, '가격'의 측면을 살펴보자. 식량무기화론자들은 농업이 개방되면 거대 독점기업들이 제멋대로 가격을 올릴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역시 식량무기화론자들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몇 가지 예만 살펴보자. 우리는 이미 몇 가지 곡물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밀의 99%, 보리의 93%, 콩의 75%가 수입산이다. 식량무기화론자들의 논리대로라면 이들 곡물의 가격이 폭등해야 마땅하다. 우리 농업이 밀, 보리, 콩을 수요만큼 생산할 능력이 없으니 외국의 거대자본들이 마음껏 폭리를 취해도 속수무책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식량무기화론자들은 결정적으로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 세계 농업 시장은 독점시장이 아니다. 실제로 80년대 이후 세계 시장에서 농산품 가격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세계 농업 시장이 몇몇 거대 외국기업이 마음대로 폭리를 취하는 독점시장이라면 어떻게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식량의 상당부분 혹은 대부분을 수입하는 나라들이 한 둘이 아닌데 어째서 곡물가격이 폭등하기는커녕 폭락하고 있는 것일까?
세 번째로, '안보'의 측면을 살펴보자. 식량무기화론자들은 만약 전쟁이 벌어져 곡물수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재앙이 닥쳐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식량무기화론이 전혀 현실을 설명하지 못 한다는 것이 이 점에서 더욱 명명백백히 드러나고 만다. 대포, 미사일, 탱크, 전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소총의 총알까지 모두 수입산 원재료로 만들어지고 있다. 비록 우리나라에 세계 4위의 철강기업인 포스코가 있어도 철광석같은 원재료는 전량을 수입에 의존한다. 식량이 무기화될 수 있다면, 어째서 철광석은 무기화될 수 없는걸까? 외국이 식량줄을 틀어쥐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식량무기화론자들은 어째서 진짜 '무기'를 만드는 원재료의 '무기화'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걸까? 만약 식량무기화론이 진실이라면, 우리가 '안보'를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아마도 제국주의 밖에 없을 것이다.
식량무기화론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론이다. 더군다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일시적으로 진보적인 구실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깊이 따지고 보면 진보적이라 할 수도 없다. 식량무기화론자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여러 강대국에서 농업을 보호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우리도 농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작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바로 그 강대국들이 자국 농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지급하는 2,300억달러의 농업보조금이 최빈국 농민 수 억명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식량무기화론자들은 미국의 힘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고, 우리나라의 힘을 지나치게 축소해석한 나머지 그릇된 결론에 다다르고 말았다. 미국은 강대하고 종종 횡포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도요타, 현대자동차 등 외국 회사들의 추격으로 GM을 비롯한 미국 자동차 회사들이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 멋대로 외국 자동차 회사들을 시장에서 축출할 수는 없다. 식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휴머니즘에 기반하고 있을지라도, 현실과 맞지 않는 이론이 종종 있다. 식량무기화론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식량무기화론'은 재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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