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4명. 한국의 펀드매니저 숫자다. 그들이 굴리는 돈은 300조원으로 시장에서 마법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매니저 손길 한번에 천문학적 뭉칫돈이 불어났다 사라지고, 수십만 명 투자자가 울고 웃는다.
그러나 고수(高手) 대접을 받는 매니저가 되긴 쉽지 않다. 한데 올해 펀드운용 금메달 감을 꼽을 때 떼논 당상으로 평가받는 한 사내가 있다. 바로 한국밸류자산운용의 이채원(43ㆍ사진) 전무다. 그가 지난해 4월 내놓은 '10년 투자 펀드'는 남다른 투자철학과 높은 수익률로 입소문을 타고 장안의 돈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 펀드는 연초 이후 52%의 수익을 올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 상승률(33%)를 크게 앞질렀다. 최근 중앙SUNDAY 설문 결과 자산운용사 사장들까지 '가장 가입하고 싶은 펀드'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시장의 맹호복초(猛虎伏草) 같은 존재였다. 호랑이가 풀밭에 엎드려 지내듯 20년간 ‘가치투자’라는 외로운 울타리에서 시장과 씨름해왔다. 하지만 영웅은 언젠가 세상에 진가를 드러낸다고 했던가. 10년 만에 온다는 불꽃 장세에서 투자자들은 이 전무의 진면목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를 만나 투자 비결을 파헤쳐봤다.
■시련
그는 요즘 장이 끝난 뒤면 가끔 창 밖을 내다보며 8년 전을 떠올린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뜨끔해요.” 이 전무는 1998년 말 동원투신에서 일할 때 가치투자를 지향하는 ‘밸류 1호’를 내놓았다. 국내 최초의 가치주 펀드였다. 그의 종목 고르는 안목이 먹혀들면서 펀드는 펄펄 날았다. 상반기를 거쳐 7월까지 수익률이 120%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해 가을부터 거센 역풍이 불었다. '기술주 거품'이 극성을 부린 것이다. "새롬기술ㆍ다음 같은 IT종목들은 훨훨 날았죠. 그런데 내가 펀드에 넣은 롯데칠성ㆍ농심ㆍ태평양 같은 종목은 거꾸로 주가가 많이 떨어졌어요." 펀드 투자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성난 투자자들의 환매가 이어졌고, 그는 온몸에 병이 났다. 손이 떨려 주식매매 단말기를 누를 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는 2000년 초 장기 휴가원을 내고 한 달간 병원에 입원했다.
“제 투자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반성도 많이 했어요." 그러나 결국 유행에 편승해 변변한 수익모델도 없는 IT주를 살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이후 그는 6년간 회사 자금을 운용하다 지난해 다시 돌아와서 ‘10년 투자’펀드를 만들었다. 이 전무는 자신이 '후천적 가치투자자'라고 했다. 그는 중앙대 경영학과를 나와 88년 동원증권에 입사했다. 그러나 당시 지점에서 원금의 2.5배씩 미수거래를 해서 샀다 팔았다를 되풀이하는 전형적인 브로커였다. 그 후 2년간은 차트를 보며 기업 가치보다는 매매동향에 매달리는 기술적 분석에 치중했다.
그러다 일본 도쿄사무소에서 2년 근무하면서 그의 세상은 바뀐다. “피델리티처럼 유수한 회사의 펀드매니저들은 노트북에 10년치 데이터를 넣고 다니면서 하루 7개 기업을 탐방하더라고요. 충격을 받았죠.” 그 뒤론 책을 놓지 않았다. 일본에서 투자의 고전을 30여 권 읽으며 기본기를 배웠다. 그는 그렇게 단련해가며 한국적 가치투자 모델을 만들어 나갔다.
■성공한 리트머스 시험지
그러나 그는 “나도 겁 많고 소심한 투자자일 뿐”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거름이 됐다고 했다. “제 성격이 중요한 자료가 있으면 복사본을 여럿 떠서 사무실이며 집안 곳곳에 분산 배치하거든요. 주식 살 때도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하게 마련이죠.”
그는 자신의 재기에 대해 투자대가인 벤저민 그레이엄이 선물한 가치투자라는 ‘지혜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그러곤 성공 비결을 투자자에게로 돌렸다. 10년 투자 펀드를 내놓을 때 산고(産苦)를 많이 겪었다. 이자보다 조금 높은 10%대의 목표 수익률에, 10년간 묻어둘 것을 권유하고, 환매도 3년간 못하는 펀드에 누가 돈을 넣느냐는 소리가 비오듯 했다. “가치투자 펀드가 먹힐지 잴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던 셈이죠.”
그런데 막상 상품이 선을 뵈자 자금이 밀려들었다. “광고를 보고 지방에서도 5억원, 10억원씩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고객 믿음을 등에 업고 10년 투자 펀드는 올 8월 1년4개월 만에 순자산가치 1조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국내에서 가치투자형 펀드의 비중이 7%에 불과하고, 펀드투자도 3개월ㆍ6개월 단타 매매가 성행하는 현실에서 시장도 놀라워했다.
그는 “오너인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부회장의 뚝심도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고 했다. 가치투자의 철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김 부회장은 이 펀드에 회사 돈 1000억원을 선뜻 넣어주었다.
■나는 이렇게 투자한다
“10년 투자 펀드의 포트폴리오엔 잘나가는 주식이 없어요.” 그는 “돈 버는 실력으로 보나 회사 됨됨이로 보나 어떤 주식에 숨어 있는 가치가 10만원인데, 시장에서 5만원에 거래된다면 주저 없이 사들인다”고 강조했다. 내재가치가 좋은 주식이 헐값일 때 사서 그 가치가 빛을 발할 때까지 끈기를 갖고 기다리는 게 가치투자 비결이라는 얘기다.
그가 올해 사들인 포스렉ㆍ동일방직ㆍ경동가스 같은 주식이 그렇다. 말은 쉽지만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이 전무는 투자자들이 우량주 개념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옛날엔 덩치가 크고 이익을 많이 내면 우량주였지요. 지금은 ‘충격 내성’이 잣대예요.” 이를테면 중국의 성장세가 주춤하면 이익이 휘청거릴 기업들이 많다는 것이다.
“구체적 시기와 강도는 아무도 모르지만 ‘차이나 쇼크(China shock)’는 올 겁니다.” 경기민감형ㆍ중후장대형 주식이 유행인 한국에서 소나기에 대비하는 방어적 포트폴리오가 절실하다는 조언이었다.
그는 “차별화한 물건을 만드는 힘을 가진 회사를 찾는 게 가치 투자자의 숙명”이라고 했다. “몇 년 전 신용카드 회사들이 똑같이 조단위의 순이익을 낸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한순간의 업황 때문에 모든 회사가 좋다면 투자매력은 떨어집니다.” 자신만의 실력도 없으면서 굴러들어온 떡 먹기에 바쁜 기업은 결국 언젠가 쪽박을 차기 마련이란 판단이다.
원칙과 목표 없이 남만 쫓는 투자를 하다간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조언도 했다. “워런 버핏은 ‘바보가 경영해도 잘 굴러가는 회사가 좋다’고 했어요.” 예컨대 코카콜라처럼 소비자 기호와 규모의 경제를 품고 있는 종목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무는 “서너 해 전만 해도 주가수익비율(PER)이 낮은 기업이 많았고 앉아서 좋은 주식을 주울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가가 많이 올라 종목 발굴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양(量)보다는 질(質)을 많이 본다. 비즈니스 모델이나 지배구조, 경영자 능력을 말한다.
물론 그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내재가치 자체가 하락하면 문제가 되지요.” 괜찮다고 여겨 주식을 싸게 사 놓고 마냥 기다린다고 결과가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도 10종목을 사면 1~2개 종목은 실패한다. “주식투자를 속된 말로 하면 ‘노가다’예요.” 10시간 분석하면 수익률이 1%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 전무는 올 들어 ‘재미있는 모습’이 관찰된다고 했다. 주가가 급등하니 개인투자자 돈이 안 들어오고, 급락하면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펀드매니저 생활 20년간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영리한 투자자’가 늘었다는 방증입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눈높이를 낮추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올 상반기 같은 급등장세는 앞으로 상당 기간 다시 보기 힘들 것이란 지적이었다.
그는 “‘성공한 투자자’소리를 들으려면 철저하게 자신의 성향과 돈의 용처, 만기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잘 안 됩니다.” 그는 우선 운용사 내부 문제를 꼽았다. “펀드를 환상적인 포트폴리오로 채워도 수익률이 잠깐 떨어지면 ‘왜 성과를 못 내느냐’고 깨지는 게 국내 문화예요. 은행ㆍ증권사 같은 판매사도 난리를 칩니다. 일선 판매창구에선 빨리 수익률을 올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는 “운용사들이 펀드매니저를 믿고 3~5년은 기다려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만기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환매 가능 기간을 고려하면 현재 펀드 수명은 사실상 ‘3개월짜리’라는 것이다. “고객들에게 더 많은 과실을 주려면 ‘좋은 포트폴리오’도 중요하지만 ‘오래가는 포트폴리오’가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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