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
SK하이닉스가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 HBM3E) 12단 양산에 착수한 것은 2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선 확고한 기술 리더십 수성이다. 과거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1위 삼성전자와 그 뒤를 추격하는 SK하이닉스의 양자 대결 구도였다. 하지만 HBM과 같은 인공지능( AI) 메모리가 각광받으면서 3위 마이크론과 중국 업체들의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됐다. 투자나 기술개발이 잠시라도 지연되면 곧바로 경쟁업체에 자리를 내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26일 “특히 HBM과 같은 선단 메모리의 개발주기가 1년 안팎으로 짧아져 ‘기술개발-검증-양산’으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가 더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며 "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 양산에 성공하면서 경쟁사와 격차를 벌리고 다음 제품까지 다시 한 번 시간을 벌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최근 HBM 개발 경쟁은 말 그대로 속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이크론의 경우 최근 HBM3E 12단 샘플 제품을 엔비디아 등 고객사들에게 공급했다고 발표하는 등 국내 업체들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만약 마이크론이 연내 양산에 들어간다면 SK하이닉스와 격차가 석 달 이내로 좁혀지는 셈이다. 물론 양산에 성공하더라도 전체 생산능력과 수율 등에서 일정 수준 차이가 발생하겠지만 엔비디아나 구글같은 기업들이 매년 새로운 고성능 메모리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언제든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삼성전자도 엔비디아 등 고객사를 상대로 5세대 HBM에 대한 검증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이번에 양산에 돌입한 5세대 HBM은 3기가바이트( GB) 용량의 D램 12개를 수직으로 쌓아 성능을 끌어올린 제품이다. 현재는 8단 24GB가 최고 제품이었는데 이를 12단 36GB로 업그레이드 했다.
이 같은 업그레이드에는 초고난도 공정이 요구된다. D램을 4단 더 올리면서도 전체 HBM 두께는 기존 8단 제품과 똑같이 유지해야 한다. HBM의 글로벌 표준 규격에 맞추기 위한 조치다.
SK하이닉스는 이 같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단품 D램 칩의 두께를 기존 칩보다 40% 얇게 깎아냈다. 얇은 칩 12개를 수직으로 쌓는 공정에서는 SK하이닉스가 자랑하는 '매스 리플로우 몰디드 언더필( MR-MUF)' 공정이 적용된다. 이는 D램 칩 사이에 액체 형태의 보호재를 주입해 D램을 연결하는 공정으로 기존 기술보다 안정성이 더 높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SK하이닉스의 한 관계자는 "이번 제품은 현존 메모리 중 최고의 동작 속도를 구현한다"며 "만약 이 제품 4개를 탑재한 그래픽처리장치( GPU)로 메타의 거대언어모델인 '라마3'를 구현할 경우 700억 개의 전체 파라미터(매개변수)를 초당 35번씩 읽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시장에서 제기됐던 HBM 등 고부가 메모리의 공급과잉 우려를 씻어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미국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최근 '메모리, 겨울이 오고 있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레거시 D램·낸드는 물론 첨단 메모리 제품에서도 공급 과잉이 시작됐다고 경고했다. 내년부터 미국 빅테크들의 AI 투자가 감소하면서 → HBM이 필요한 AI 가속기와 데이터센터 수요가 줄고 →경기 침체로 스마트폰 등 정보기술( IT) 기기 판매도 급감해 → 전체 메모리 가격이 떨어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게 모건스탠리의 논리였다. 그러나 고객사들이 기존 일정에 맞춰 최선단 HBM 발주를 유지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 같은 논리구조가 사실상 무너졌다.
황민성 삼성증권 연구원은 "비(非) 엔비디아 진영이 경쟁적으로 AI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어 수요 확대의 창은 여전히 열려있고 반대로 공급은 여전히 제한적"이라며 "특히 12단 제품 중심으로 제품 믹스가 변화되면 공급 과잉에 대한 우려가 해소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골드만삭스 역시 최근 리포트에서 "내년 HBM 수요는 193억 GB로 공급(188억 GB)를 초과할 것"이라며 "내년 소화되는 HBM 공급물량 중 절반을 5세대 제품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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