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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 될 상인가"…해인사 '세조 얼굴' 600년 미스터리게시글 내용
2013년 개봉한 사극영화 ‘관상’(감독 한재림)에서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정재)은 관상쟁이 내경(송강호)에게 이렇게 묻는다. 화면 가득 이정재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가운데 송강호는 속으로 독백한다. ‘남의 약점인 목을 잡아 뜯고 절대 놔주질 않는 잔인무도한 이리, 이 자가 진정 역적의 상이다.’
실제 세조(재위 1455~1468)는 어떻게 생겼을까. 조선 전기 왕들의 어진(御眞)이 임진왜란 중에 대부분 소실되면서 유일하게 원형대로 전해지는 건 태조 어진(국보)밖에 없다. 다만 세조의 경우 국립고궁박물관에 어진 초본이 남아 있다. 1935년 조선왕실 마지막 어진화사였던 김은호(1892~1979)가 오래된 세조 어진을 모사하기 위해 그린 밑그림으로 이후 어진이 소실된 상태에서 유일한 공식 초상화다. 영화 속 이정재의 날카로운 이리 상(像)과 대조되는, 후덕하고 넓대한 얼굴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 ‘해인사에 봉안된 세조의 진영’이 있다. 진영이란 초상화를 높여 부르는 말. 지난 5일 개막한 서울 조계사 경내 불교중앙박물관 전시 ‘큰 법 풀어 바다 이루고, 교종본찰 봉선사’를 통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박물관 측은 진영 아래쪽에 쓰인 화기(畵記)를 근거로 “1458년 윤사로와 조석문이 세조의 명으로 진영을 조성해 해인사 금탑전에 봉안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선 고궁박물관의 세조 어진 초본과 이 세조 진영을 나란히 전시해 둘을 비교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척 봐도 얼굴 생김새가 상당히 닮았다. 밑그림과 채색화라는 차이가 있긴 해도 위엄 있는 군주의 풍모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엄격한 절차에 따라 어진화사가 그렸던 세조 어진 쪽이 단아하고 늠름하게 표현됐고 좀 더 젊은 인상이다. 이에 반해 해인사의 세조 진영은 구성부터 상당히 복잡하다. 곤룡포를 입은 세조 양옆으로 관모를 쓴 남자 2명과 부채를 든 동자 2명이 있고 뒤로는 5폭 병풍이 있다. 태조 어진과 비교할 때 색채 사용도 다채로운 편이다.
정통 어진은 아닐지라도 약 600년전 임금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 큰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해인사 세조 진영은 국보·보물 같은 국가지정문화유산도 아니고 지방문화유산에도 지정되지 못했다. 2003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에 지정된 게 전부다. 아무리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꼭꼭 숨어 오랫동안 학계나 고미술계의 눈길이 닿지 않았다 해도 의아한 일이다.
이에 대해 문의하자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 측은 “어진이라 해서 모두 국보·보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 진영의 경우엔 사찰에서 그려 전해진데다 화기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조심스레 설명했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해인사의 세조 진영은 ‘불교문화재 일제 조사’(2002~2013년)가 진행되던 2008년쯤 파악된 바 있고 그에 앞서 2003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에 지정됐을 때 조사 내용이 넘겨져 들어왔다고 한다.
이때 조사한 바로는 해인사 소장 진영이 조선 전기 양식과 사뭇 달랐다. 예컨대 세조가 입은 곤룡포의 경우 흉배가 넓고 원형에 가까워야 하는데 조선 후기 양식처럼 네모지고 작은 형태다. 또 왕의 어진을 그릴 땐 단독 초상이어야 하는데 해인사 진영엔 주변에 시중 드는 관료에다 엉뚱한 동자상까지 있다.
이런 초상화 형태가 조선 후기에 유행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와 흡사하다는 시각도 있다. 지장시왕도란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여, 명부에 있는 10명의 시왕을 함께 그린 불교 탱화를 일컫는다. 불교중앙박물관 측도 도록에서 “왕실에서 제작한 어진과는 달리 불화적 요소를 가미하여 독특한 도상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그림 맨 아래 화기는 어떨까. 이에 대해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그림이 조선 후기 양식이듯이 글씨도 훗날 가필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게다가 조선시대 임금의 얼굴을 아무나 함부로 볼 수 없었고 어진 제작은 마치 임금을 대하듯 갖은 의례와 절차에 따라 진행됐단 점에서 해인사 진영을 ‘세조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초상화’로 간주하기엔 근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의문이 남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이 화기와 맞아떨어지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세조실록 13권(세조 4년 7월 28일) 계축 첫 번째 기사에 따르면 ‘영천 부원군 윤사로와 조석문 등을 해인사에 보내어 불사(佛事)를 행하려고 하였으나, 사헌부에서 흉년이 들었으므로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다만 조석문만을 보냈으며’라고 돼 있다. 윤사로는 수양대군의 왕권 쿠데타인 계유정난 때 일등공신이며 조석문 역시 세조의 측근 심복이었다.
이 그림이 세조 어진 초본 얼굴과 엇비슷하다는 점도 후대에 조성된 상상도라고 단정 짓기 어렵게 한다. 왕실 어진이 성스럽게 봉안돼 일반인이 전혀 접근할 수 없었단 점에서 해인사 진영이 이를 모사했을 가능성은 '제로'다. 어쩌면 왕명에 따라 당대에 어떤 식으로든 그려졌다가 낡아버린 것을 훗날 모사 혹은 덧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600년 전 진본이 현재 전해진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불교중앙박물관의 관장을 맡고 있는 서봉 스님은 “진영의 화기를 의심할 이유도 없고 해인사에 소중히 보관돼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그림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며 세조 초상화 원본이란 입장을 확고히 했다. “이번 전시에 이 그림을 내세운 것도 존재를 널리 알려 보다 면밀한 조사를 받게 하겠다는 취지”라면서다.
서봉 스님은 2018~2019년도 해인사 성보박물관장을 지내면서 문제의 세조 진영을 확실히 인식했다고 한다. 이번 특별전 기획 당시 세조 어진 초본이 전시되는 걸 알게 되자 “비교하는 차원에서 꼭 필요하다”며 해인사 측을 설득하고 처음으로 사찰 바깥으로 내온 것도 스님의 노력이었다.
서봉 스님은 “우리나라 불교 미술사 연구가 계속 진화하고 있어 10년 전 조사내용으로 단정할 수 없다”면서 “국가유산청 차원에서 제대로 된 국보·보물 심사를 할 수 있도록 전시가 끝나는대로 해인사 측을 설득해 국가지정유산 신청을 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피의 군주’로 여겨지는 세조의 실제 얼굴, 과연 어땠을까. 서봉 스님 희망대로 국가지정문화유산 조사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해인사 진영이 600년 전 원본이란 게 밝혀지게 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그림이 왜 ‘세조 진영’으로 전해졌으며 이 그림을 사찰에서 귀하게 보관한 이유가 무엇일지 또 다른 미스터리도 발생하겠다.
한편 이번 특별전에는 경기 북부 지역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보물 15건을 비롯해 총 93건 262점의 문화유산이 전시된다.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와 말사인 용문사, 회암사, 흥국사 등이 소장한 유물이 대거 나왔다. 남양주 봉선사는 세조와 정희왕후가 묻힌 광릉의 능침사찰로서 이 같은 연관성 때문에 전시회에서 세조 어진이 부각됐다.
높이 8m에 육박하는 대형 불화인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 10월 2일부터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로비에서 관람객을 맞게 된다. 전시는 12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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