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 반군에 사살된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후계자였다.
1972년생. 사진은
2011년 생포된 뒤 재판에 회부된 당시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런 사이프 카다피가 워스와의 인터뷰에서 침묵을 깼다. 장문의 인터뷰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NYT 매거진 톱기사로 게재됐다. “카다피의 아들이 살아있다. 그는 리비아의 대통령을 꿈꾼다.” NYT가 단 제목이다.
기사는 중편소설에 가깝다. 글자 수만 약 6만 2000자, 기사를 전문 성우가 읽는데 1시간 3분 5초가 걸린다(단편소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전문이 약 1만 1600자다). 워스는 미국 뉴욕에서 나고 자란 뒤 NYT의 레바논 베이루트 지국장을 역임하고 평생을 중동 취재에 바쳤다. 현재 중동 전문 프리랜서 기자 겸 작가다. 사이프 카다피와 인터뷰를 위해 지난 2년6개월 간 공을 들였다고 한다.
내 이름은 ‘이슬람의 칼’
올해 49세인 사이프 카다피는 차남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영국 명문 런던정경대( LSE)에서 박사학위도 받으며 국제 감각도 갖췄다. 한때 그를 두고 국제사회가 리비아를 바꿀 인물로 기대했던 까닭이다. NYT는 “완벽한 영어와 민주주의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이프는 국제사회의 희망이었다”며 “리비아를 점진적으로 혁신할 인물로 받아들여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리비아의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는 데 앞장서며 국제사회의 기대를 보란 듯 저버린다. 이후 반군에 생포된 뒤 그는 푸른 수의 차림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재판정에 섰다. 도주를 우려한 반군 측은 특별 창살을 설치해 그를 가둔 채 재판을 진행했다. 이 사진은 리비아 카다피 가(家)의 몰락의 상징으로 통했다.
장남은 아니지만 후계자로 낙점됐다는 점 때문에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아버지 카다피는 생전 북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를 이은 친분을 과시했다. 그를 조명한 프랑스 24 기사에 따르면 사이프의 이름은 아랍어로 ‘이슬람의 칼’을 의미한다.
1982년
10월, 리비아 최고지도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방북했다.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 주석과 악수하고 있는 모습. [노동신문]
10년 뒤, 상황은 변했다. 그는 풀려났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어디에서 지내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NYT와의 인터뷰를 위해 사이프 카다피는 검은 승용차를 보냈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약 2시간을 달린 뒤 진탄 고원 즈음에 차가 멈췄다. 운전을 담당한 이가 “핸드폰과 모든 전자기기는 여기에 두고 나오라”고 했고, 그는 곧 다른 차에 태워진 뒤 어딘가로 이동했다. 워스는 이렇게 적었다.
“초조하고 두려웠다. 사이프와 수 차례 통화를 하긴 했지만 전화선 너머 그 사람이 진짜 사이프인지 확신할 수 없지 않은가.
10년간 외국 기자를 만난 적이 없는 사이프다.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부터, 리비아 현지인까지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워스의 불안감은 곧 기대로 바뀐다. 그는 곧 어느 방으로 안내됐는데, 불쑥 누군가가 “어서오시게”라며 악수를 청했다. 영어는 유창했고, 내민 손엔 엄지와 검지가 없었다. 사이프 카다피였다.
NYT 매거진 톱으로 등장한 무아마르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카다피. [
NYT 캡처, 사진 촬영
Jehad
Nga]
비운의, 비정한 후계자
워스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그는 우리를 거실로 안내했고 (리비아 국기 색이기도 한) 녹색 빛 의자에 앉게 했다. 두꺼운 양탄자와 커튼, 크리스탈 샹들리에로 둘러싸인 방은 화려했고, 치장하는데 돈이 꽤 들었을 것 같았다. 사이프 역시 금술이 달린 화려한 옷 차림이다. 역시나 카다피의 아들인지, 쇼맨십을 물려받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사이프에게 여전히 죄수 신분이냐고 물었다.”
“아니, 난 자유의 몸일세.” 사이프 카다피는 답했다. “그리고 정치권으로 컴백을 도모하고 있는 중이지. 나를 겨냥했던 반군들 중 내 감시를 맡았던 이들 말야, 이젠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됐다네.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사이프 카다피의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한다.
2011년 미니 감옥에 갇힌 채 재판을 받는 수의 차림의 사이프 카다피. 로이터=연합뉴스
“반군은 나라를 강간한 것과 마찬가지야. 무릎을 꿇렸고, 돈도 이젠 없고 안전보장도 안 돼있지. 삶이라는 게 없어. 주유소에를 가보게. 넣을 기름이 없어. 우린 산유국이고 이탈리아에 수출까지 하는데 말이지. 이탈리아 자동차는 우리의 기름으로 굴러가는데 우린 기름이 없어서 정전 사태야. 이건 단순한 실패를 넘어 재앙 수준이야.”
그러나 사이프 카다피의 과거악은 그대로다. 워스는 “카다피가 컴백을 꿈꿀 수 있는 건 그가 그동안 부재(不在)했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그의 존재가 잊혀졌던 덕분에 그가 그나마 재기를 꿈꿀 수 있는 것이고, 리비아 국민이 그를 다시 권력자로 인정할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사이프 카다피 역시 이 점을 알아서일까. 대권 출마를 직접 시사하지는 않았다. 워스는 “리비아 안팎에선 그가 대선에 출마할 것이란 예상도 나오지만 정작 그 자신은 말을 아꼈다”며 “그러나 그의 세력이 국가를 다시 통합할 수 있으리라고 강조했다”고 적었다.
2011년 생포 직후 사이프 카다피. 붕대를 감은 손가락 중 엄지와 검지는 절단됐다. 로이터=연합뉴스
리비아의 대선과 총선은 올해 12월로 예정돼있다. 워스는 “사이프와의 인터뷰 이전 리비아 현지를 다녀봤다”며 “사이프의 평가에 리비아 국민은 대부분 동의하긴 할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매일 100만 배럴의 원유를 퍼올리는 리비아엔 전기는 물론 생수도 부족하다”며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건 리비아가 (그간의 내전에 이어) 또다른 갈등과 분열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따름”이라고 전했다. 그 틈을 사이프 카다피가 파고 들고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일반 시민을 포함한 반군을 유혈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사이프 카다피의 변명은 뭘까. 워스가 이에 대해 묻자 그는 “당시 (반군 측이) 과도한 무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워스는 “사이프 카다피는 당시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너무도 쉽게 유혈 진압을 종용했다”고 선을 긋는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아이들이 더위를 피해 풀에 뛰어들고 있다. 지난달 5일 사진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사이프에 대해 워스는 “독재자 아버지를 보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이프는 서구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와도 잘 지내야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유학도 했다”면서도 “그러나 한 가지 바뀌지 않는 사실은 그는 카다피 가의 일원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사이프 카다피의 이름을 곧 국제 뉴스에서 볼 가능성은 커보인다. 그는 리비아에 뼈를 묻을 생각이다. 그가 워스에게 남긴 다음 말을 보면 그점만큼은 확실하다.
“우리는 물고기 같아. 리비아는 바다고. 물고기가 어디에 사나. 바다에 살지. 바다에서 싸우고. 바다에서 도움을 받고. 리비아 사람들은 우리에게 바다와 같은 존재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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